히로시마(広島) – 평화와 기억의 도시
도시에 도착한 첫 인상은 의외였다. 활기차고 질서 정연한 거리, 공원에서 산책하는 시민들,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까지. ‘전쟁’과 ‘폭격’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일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여기는 단지 아픈 역사를 지닌 도시가 아니라, 그 위에 일상을 덧입혀온 사람들의 도시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평화기념공원, 침묵 속의 이야기
첫날 아침, 나는 숙소에서 걸어 평화기념공원으로 향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길 찾기도 쉬웠고, 공원으로 향하는 길목엔 이미 많은 이들이 조용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말소리도, 셔터 소리도 자제된 듯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자연스레 말수가 줄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원폭돔이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그 모습,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 두고 보니 완전히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무너져내린 철골 구조, 깨진 유리창, 그럼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그 모습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증언 같았다.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주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이곳까지 와서 당신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물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잔잔했다. 평화라는 단어가 왜 이토록 아프게 느껴지는지 그날 처음 알았다.
어린이 평화기념상과 사사키 사다코의 이야기
공원을 걷다 보면 색색의 종이학이 유리관 안에 가득한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어린이 평화기념상’, 바로 사사키 사다코의 사연을 바탕으로 세워진 상이다. 백혈병으로 투병 중이던 그녀가 “천 마리의 종이학을 접으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하루하루 학을 접었다는 이야기. 그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종이학을 바라보며 나는 그 아이가 접었을 마지막 학은 어떤 마음으로 마무리했을까를 생각했다. 그 마음이 시간과 국경을 넘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씩 심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기억하는 것이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걸.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 기억의 깊이
이어 방문한 평화기념자료관은 솔직히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가야 했다. 외관은 모던하고 정돈되어 있었지만, 내부로 들어가자 당시의 참혹한 순간들이 차분하지만 강력하게 펼쳐졌다. 녹아내린 유리컵,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탄 교복, 폭발 시간에 멈춰버린 손목시계…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다.
전시물 옆에는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텍스트와 인터뷰가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아버지의 증언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내 아이가 마지막으로 나를 봤던 순간, 나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문장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료관은 단순히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과 슬픔, 다짐이 함께 숨 쉬는 곳이었다.
도심으로 이어지는 조용한 일상
자료관을 나서자 바깥은 여전히 평온했다. 관광버스가 오가고, 현지 학생들이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 풍경이 오히려 더 감동적이었다. 이곳은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아픔을 지웠거나 덮은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는 도시였다.
나는 근처의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 말차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따뜻한 컵을 손에 쥐고 창밖을 바라보니, 공원을 산책하는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었다. 그 장면 하나에도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살아간다는 건, 아픔을 견디며 웃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미야지마 – 물 위에 떠 있는 시간
이튿날은 JR과 페리를 타고 미야지마로 향했다. 히로시마에서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섬이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잔잔한 바다 위에 붉은 도리이가 우뚝 서 있었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조용한 신사와 숲길이 나를 맞이했다.
이츠쿠시마 신사의 정갈한 건축미와 바다를 바라보는 조용한 구도는 히로시마 시내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절묘하게 이어졌다. 고요하고 단단한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 나는 이곳에서 한참을 걷고, 아무 말 없이 벤치에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무리하며 – 평화를 지켜내는 도시
히로시마는 여행지로서 화려하진 않다. 쇼핑이나 유행을 좇는 이들이 많지 않고, SNS에 자랑할만한 핫플레이스도 드물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도시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도시는 ‘기억’을 통해 평화를 지켜낸다.
그 기억은 사람을 무겁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따뜻하게도 만든다. 나 또한 이 도시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내려놓았다. 누군가에겐 그냥 조용한 일본의 도시일 수 있지만, 나에겐 다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말해준 곳이다.
히로시마는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평화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배웠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기억하고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 도시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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