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자와(金沢) – 작은 교토, 현대와 전통의 조화
“도쿄, 오사카, 교토는 다 가봤는데… 그 다음은 어딜 가지?” 이런 고민을 하던 중 문득 눈에 띈 도시가 있었다. 가나자와. ‘작은 교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소개가 붙어 있었지만, 솔직히 처음엔 그냥 조용한 중소도시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녀와보니, 오히려 그런 도시가 주는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첫인상 – 조용한 정돈됨, 그리고 기대감
가나자와역에 도착한 순간, 눈앞에 펼쳐진 츠즈미몬이라는 거대한 목재 문과 유리 천장이 맞물린 역의 풍경이 먼저 날 반겼다.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엮인 그 조형물 하나에 이 도시가 추구하는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심의 분위기는 아주 차분했다. 도쿄처럼 붐비지도, 오사카처럼 활기차지도 않았지만 그 조용한 정돈됨이 오히려 더 인상 깊었다. ‘이 도시, 뭔가 있겠다.’ 그렇게 내 마음에도 작지만 단단한 기대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겐로쿠엔 – 단순한 정원이 아닌, 시간의 공간
가나자와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로 꼽히는 겐로쿠엔 입구부터 마주한 광활한 정원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고 다층적이었다.
작은 연못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 바위와 이끼가 어우러진 돌계단, 잎을 떨어뜨린 단풍나무 뒤로 부드럽게 퍼지는 햇살. 정원이 보여주는 풍경은 계절의 한 장면이 아니라 수백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일종의 ‘역사’처럼 느껴졌다.
잠시 멈춰서서 한 바퀴 둘러봤다. 내 앞을 걷던 연세 많은 부부는 말없이 서로의 걸음에 맞추고 있었고, 벤치에 앉은 여행객들도 모두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위로받을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겐로쿠엔이었다.
히가시차야가이 – 그 골목에서 과거를 만나다
정원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가나자와의 대표적인 전통 거리, 히가시차야가이 나무 창살이 줄지어 선 골목은 마치 시간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낮에는 조용히 산책하는 여행자들로, 밤이 되면 은은한 조명과 전통 악기 소리로 채워지는 거리. 나는 낮과 밤, 두 번이나 이 골목을 걸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건 전통 찻집에서 마신 따뜻한 말차와 화과자 한 접시.
그건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라, 한 입 한 입에 담긴 ‘일본의 리듬’ 같았다. 전통이 삶 속에 녹아 있다는 걸 이곳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21세기 현대미술관 – 의외성의 미학
‘가나자와에 현대미술관?’ 이 도시를 찾기 전까진 몰랐다. 하지만 막상 방문한 가나자와 21세기 현대미술관은 전통적인 도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색깔을 보여줬다.
유리 외벽으로 둘러싸인 건물은 건축 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았고, 내부는 ‘미술관’이라기보단 열린 실험실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풀장 아래에서’라는 설치미술.
물 위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감각, 그리고 물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감각. 이 도시의 전통이 아래에서 받쳐주고, 현대성이 위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느낌과 닮아 있었다.
오미초 시장 – 이 도시의 심장 소리
겐로쿠엔이 가나자와의 얼굴이라면, 오미초 시장은 그 심장이다.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실제로 지역 주민들이 장을 보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아침 일찍 시장을 찾았다. 좌판마다 싱싱한 생선과 채소, 해산물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시장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했다.
한 해산물 가게 앞에서 성게를 시식하게 되었고, 점심으론 참치, 도미, 이꾸라가 얹힌 해산물 덮밥을 먹었다. 신선한 바다의 맛과 함께 느껴지는 따뜻한 인심. 도시의 인상은 결국 사람에서 완성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나에게 가나자와란 – 조용히 다가오는 도시
가나자와는 크지 않다. 볼거리도 많지만, 사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머무느냐’가 중요한 도시다.
크게 떠들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흘러가는 곳. 전통이 지나간 자리에 현대를 올려놓았지만 둘 사이에 충돌이 아닌 조화가 있다.
겐로쿠엔의 나뭇잎이 흔들리던 그 바람, 차야가이 골목의 나무 향, 시장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 미술관의 투명한 유리 벽 사이로 들어오던 햇살. 이 모든 것이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가나자와는 또 오고 싶다고 느끼는 도시가 아니라, 언젠가 조용히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도시다. 다음엔 더 천천히, 더 길게 그 길을 걷고 싶다.

댓글
댓글 쓰기